충주시 숭조회
HOMELOGINJOINMYPAGE

 
작성일 : 13-09-09 09:47
고구려 역사 탐방기
 글쓴이 : 충주호 숭…
조회 : 1,229  
   http://news.suwon.ne.kr/main/section/view?idx=656425 [491]
고구려는 당당한 우리 민족 국가입니다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 답사기(상)

등록일 : 2012-08-08 14:33:39 |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이다. 또한 일본도 지난 6월 원자력기본법을 개정해 핵 보유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날로 힘이 커지는 중국의 견제전략으로 미국이 살짝 눈감아준 덕분이다. 
이렇듯 동북아시아의 핵 지도가 확 바뀐 시점에서 오직 우리나라만 핵무장의 빗장을 풀지 못하고 존재감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1천 수백여 년 전 우리나라의 위세는 고구려의 영토에서 알 수 있듯 실로 광대했다. 그랬었는데, 날로 커지는 군사력과 영향력을 앞세운 중국이 얼마 전 고구려의 천리장성도 만리장성의 범위내로 확장시켰다. 중국세력에 대항해 쌓았던 고구려 천리장성까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동북공정의 일환으로서 고대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복원중인 고구려 두번째 도읍지 국내성

시민기자는 지난 2004년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 한차례 다녀온 적이 있지만 고구려의 옛 땅과 역사를 두고 중국과 갈등을 벌이는 이즈음 또다시 가보고 싶었던 터에 여름휴가를 맞아 당시 시간과 여건상 자세하게 보지못했던 곳을 다시 찾아보고 더불어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까지 돌아보았다. 

첫날 기상조건의 악화로 대련에 도착하기까지 과정, 고구려 유적지, 신의주가 보이는 단동, 그리고 혼절할 듯 아름다운 백두산의 풍광 등 답사 내내 가슴 벅찼다. 

광활한 땅을 호령했던 고구려는 우리역사의 자랑이다. 고구려의 첫도읍지 환인부터 근현대사의 아픈 뉴스로 간간이 회자되는 단동 등은 우리 역사의 주 무대였다. 
인기드라마였던 고주몽의 전설이 남아있고, 장수왕 평양천도이전까지 국내성의 이야기가 살아있고, 1920년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장소였던 만주 땅, 그리고 바로 이전 시기엔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의 루트였던 곳, 이 땅의 역사를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금 되새기며 답사는 시작됐다.

7월 29일
 
오전 11시 50분, 인천에서 대련까지 가는 남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대련은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작지로서 비사성이 있는 곳이다. 첫날 주요일정을 살펴보면 대련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단동으로 이동해 압록강 유람선에 올라 북한 땅을 조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더불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현대사의 비극으로 단절된 압록단교를 관망하는 일정이기도 했다.

13:40분. “엇! 칭다오 공항이네” 계획대로라면 대련공항에 와 있어야 하는데, 나의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장난이려니 했다. 그런데, 현실이었다. 북경을 위시해 대련 등 일대가 천둥과 번개로 인한 악천후로 비행기 이착륙이 불허되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도 청도에 임시 착륙 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남방항공사측에선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마냥 비행기 안에 가두어 놓더니 시간이 흐르자 내리라고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청도공항 내에서 한동안 머무르다 또다시 입국수속을 받고 비행기에 올라 드디어 대련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활주로는 온통 젖어있었고 사위는 스모그인지 굉장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오기 전 날씨의 변화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허겁지겁 저녁을 해결하곤 다음날 답사를 위해 단동으로 향했다. 4시간정도 달린 끝에 호텔에 도착하니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답사는 ‘공(空)’쳤지만 부디 남은 일정은 잘 수행하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하다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대련 답사는 마지막 날로 미뤄졌다.

7월 30일

전날 비가 왔음인지 흙냄새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아침식사 후 바로 고구려 유적지가 분포한 집안으로 향했다. 단동에서 집안까지는 약 4시간정도 소요된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이동하는데 4시간은 이곳에선 거의 기본에 속한다.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과 경계에 놓인 이 루트는 때때로 코앞에 북한이 가까이 보이는 길이다. 최근에 일어났던 김영환 체포 고문사건으로 인해 우리 외교부의 역할에 대한 안타까움과, 몇 해 전 홍수를 입었던 신의주의 피해 등등 여러 가지를 떠올리면서 버스에 몸을 맡겼다. 

단동에서 본 신의주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 압록강을 쭉 올라가다보면 중국과 북한의 국경표시 철조망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북한 이탈주민들을 감시하기위해 단속이 엄청 심하단다. 현실적으로 보이는 대척점과는 달리 자연의 환경은 무척이나 몽환적이다. 
새들의 평화로움, 빨래를 하는 아낙, 쏘가리와 장어 등 고기를 낚는 촌로, 동네 잔치분위기, 시골 장터 등 간간이 연출되는 풍경에선 전혀 긴박감이 없다. 그리고 다시 현실, 단동초입엔 천리장성을 만리장성으로 선포하기 전부터 복원중인 성벽이 꽤 보이는 것이 이채롭게 다가왔다.

고조선부터 발해의 역사가 흐르는 요동지방, 이 땅을 잃은 지 1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곳엔 우리의 얼과 혼이 흐르고 있다. 청나라 말기 선조들이 요동지방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20세기 초 강제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만주 개발 시 집단 이주한 땅, 그리고 항일투쟁 애국지사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있는 땅이기도 한 이곳 동북3성은 흙과 풀과 나무가 동일한 우리의 땅이다. 
한족이 아닌 우리민족만이 가능한 벼농사를 이곳에 이식시킬 정도였으니 그 증거는 충분하다. 고인돌문화 등 이곳에서 출토된 구·신석기 유물까지도 동일성을 띈다고 하니.

고구려의 역사가 서려있는 비류수

길림성과 요녕성의 교차점, 혼강이라 불리는 비류수를 따라 갔다. 댐 건설로 인하여 요녕성의 수몰된 마지막 마을을 지나서야 집안에 도착했다. 이곳은 고구려의 야외박물관이라고 칭할 만큼 고구려의 건국역사와 신화 등 명비문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비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없는 장군총, 5호분 5호묘, 국내성 그리고 고구려 왕족의 무덤위로 자연 지세를 이용한 환도산성 등 고구려 최대의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다.

압록강 중상류에 위치한 집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서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유지했던 도읍지다. 이곳에는 무덤이 1만2000여기, 그중에서 7560여기가 현재 남아있다. 그중 태조대왕, 미천왕, 서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 등 왕릉만 18기가 남아있다고 하니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환도산성 입구에선 시민기자

집안에 들어서기 전 통구강을 촬영하고 국내성의 남쪽 성벽과 천혜의 요새 환도산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나머지 부분들을 섭렵해 나갔다. 모두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지난번에 비해 잘 닦아진 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라 특별한 감흥은 일지 않았다. 정말 놀란 곳은 동양회화의 극치라 불리는 ‘5회분 5호묘’다. 지난번에 만나지 못했던 고분벽화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전시된 북한의 고구려벽화 안악3호분 등 복제품전시장에서 본 느낌과는 정말 다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서기가 어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을 들어가서 만난 사신도며 수렵모양, 해와 달, 삼족오, 농사의 신 등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금방이라도 환생하여 벽을 뚫고 날아갈 듯 정교하고 힘차다. 고분벽화의 절정이랄까. 
‘이번 답사는 이것을 본 것만으로도 족하다’할 정도로 벽화를 감상하는 10여분동안 정신은 아찔하고 가슴은 두근두근 흥분되고 고구려의 고품격 예술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날 감격에 젖은 나머지 다음날 답사지 백두산은 안중에도 없을 정도였다.